陶徵君潜田居[도징군잠전거] 도잠의 전원 살이

 

- 江淹[강엄] -

 

種苗在東皐[종묘재동고] 동쪽 물가 언덕에 모 심었더니

苗生滿阡陌[묘생만천맥] 이랑이랑 무성히 모가 자랐네

雖有荷鋤倦[수유하서권] 호미질에 비록 피곤은 하지만

濁酒聊自適[탁주료자적] 탁주 힘을 빌려 스스로 즐기네

日暮巾柴車[일모건시거] 땅거미 내려앉아 수레를 덮고

路暗光已夕[노암광이석] 길은 어둑하니 빛은 이미 저녁

歸人望煙火[귀인망연화] 돌아오는 이는 저녁연기 바라고

稚子候簷隙[치자후첨극] 어린 아들은 처마 밑에 기다리네

問君亦何爲[문군역하위] 묻노니 그대 더 무엇을 하려나

百年會有役[백년회유역] 평생에 마땅히 해야 할 일 있으니

但願桑麻成[단원상마성] 그저 바람이 뽕과 삼이 잘 자라

蠶月得紡績[잠월득방적] 잠월에 길쌈할 수 있기만 바라네

素心正如此[소심정여차] 본래 마음 이와 같이 소박하거니

開逕望三益[개경망삼익] 길 치우고 좋은 벗 오기 기다리네

 

이 시를 도연명(陶淵明)의 귀원전거(歸園田居)는 제6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하여 청대(淸代) 장옥곡(張玉穀)은 고시상석(古詩賞析)에서 한자창(韓子蒼)이 말하기를 전원(田園) 6수의 마지막 편()은 행역(行役)을 서술한 것으로 앞의 다섯 수와는 다르다. 그런데 속본(俗本)에는 마침내 강엄(江淹)의 종묘재동고(種苗在東皐)를 마지막 편으로 삼았으며, 소동파(蘇東坡) 역시 그대로 따랐다. 진술(陳述)의 고본(古本)에는 다만 다섯 수가 실려 있는데, 나는 모두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마땅히 장상국(張相國)의 본()과 같이 잡영(雜詠) 6수라고 제목을 붙이는 것이 옳다고 본다[田園六首, 末篇乃序行役, 與前五首不類. 今俗本乃取江淹種苗在東皐為末篇, 東坡亦因其誤和之. 陳述古本止有五首, 予以為皆非也. 當如張相國本題為雜詠六首.]’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진술(陳述)의 고본(古本)을 따라 5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강엄[江淹] 남조(南朝)의 문인. () 고성인(考城人)으로 자는 문통(文通)이다. (남제(南齊()의 세 왕조를 섬기는 동안 양()에서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가 되어 예릉후(醴陵侯)에 책봉되었다. 문학을 즐기고 유((()에 통달하였다. 대표작으로 잡체시(雜體詩) 30수와 한부(恨賦별부(別賦) 2편이 있는데 문사(文辭)가 화려하다. 원작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의고(擬古)를 잘하였다. 그가 한번은 야정(冶亭)에서 잠을 자는데 곽박(郭璞)이라고 자칭하는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내 붓이 그대에게 가 있은 지 여러 해이니, 이제는 나에게 돌려다오.” 하므로, 자기 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어 그에게 돌려준 꿈을 꾸었는데, 그 후로는 문필이 예전만 못하여 당시 사람들이 강랑재진(江郞才盡)이라고 하였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징군[徵君] 조정에서 초빙하나 거절하고 있는 은사(隱士). 학행(學行) 있는 선비로서 조서(詔書)의 징소(徵召)를 받고, 사관(仕官)하지 않는 선비를 징사(徵士)라 하고, 그를 존칭(尊稱) 하여 징군(徵君)이라 일컫는다. 원정(遠征)을 떠난 무사의 존칭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징군[徵君] 부름을 받은 선비, 곧 징사(徵士)에 대한 존칭이다. 한위(漢魏) 이래로 학문(學問)과 덕행(德行) 있어 조정(朝廷)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은사(隱士)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후한(後漢) 때의 황헌(黃憲)이 집이 아주 가난하였으나 본분을 지키고 계속되는 조정의 초빙에 응하지 않자, 당시 사람들이 그 풍모를 존숭하여 징군이라 부르며 존경한 데서 유래되었다. <後漢書 卷53 黃憲列傳>

도징군[陶徵君] 징군은 군주에게 관직 출사를 초빙 받은 인사를 일컫는 말로, 도징군은 진()나라의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그는 중국 동진(東晋)의 시인으로 자가 연명(淵明),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다. 봉록(俸祿)을 위해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여 팽택현령(彭澤縣令)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유명하다. 문집으로 도연명집(陶淵明集)이 있다.

[] 언덕. 물가. . . .

종묘[種苗] 씨나 싹을 심어서 묘목(苗木)을 가꾸는 것. 또는, 그렇게 가꾼 묘목(苗木).

천맥[阡陌] 논이나 밭의 두렁. 전답의 경계선. 밭 사이에 난 길. 남북(南北)으로 난 것을 천(), 동서(東西)로 난 것을 맥()이라 한다. 경작지(耕作地)를 달리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자적[自適] 무엇에도 속박(束縛)됨이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생활(生活).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편안하게 즐김.

시거[柴車] 장식(裝飾)이 없는 수레로 전하여 보잘것없는 수레를 말한다. 가시나무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초라한 수레로 필로(篳簵)라고도 한다.

연화[煙火] 사람의 집에서 불 때는 연기(煙氣). 불에 익힌 음식. 즉 숙식(熟食)하는 사람들이 사는 속세를 뜻함.

잠월[蠶月] 양잠하는 달이란 뜻으로, 음력 3월의 다른 이름. 모춘(暮春).

방적[紡績] , 고치, 털 따위에서 섬유질을 뽑아 실을 만드는 일.

소심[素心] 본마음. 오랜 소원. 숙원. 평소의 마음이나 생각. 소박한 마음. 본심(本心).

개경[開徑] 오솔길을 열다. 오솔길을 치우다. 장사삼경(蔣舍三徑), 도잠삼경(陶潛三徑).

삼경[三徑] 은자가 사는 집의 정원을 이른다. 동한(東漢)의 조기(趙歧)가 쓴 삼보결록(三輔決錄) 도명(逃名)장후(蔣詡)는 자()가 원경(元卿)인데 집 정원에 오솔길 세 개를 만들어두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裘仲) 두 사람만을 불러 어울렸는데 그 둘은 모두 고상하고 청렴하며 명리를 멀리하는 선비였다[蔣詡, 字元卿, 舍中三徑, 唯羊仲, 裘仲從之遊, 二仲皆雅廉逃名之士]”라고 하는 내용이 있다. 장후(蔣詡)는 왕망(王莽)이 전권을 휘두를 때 연주자사(兗州刺史)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서 은거한 사람이다.

삼경[三徑] 삼경은 세 갈래 오솔길이란 뜻이다. 전하여 은자(隱者)의 처소를 가리킨다. 전한(前漢) 말엽에 왕망(王莽)이 황권을 찬탈하자 연주자사(兗州刺史)였던 장후(蔣詡)는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가시나무로 만든 문을 닫아두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 있는 대나무 숲에는 세 개의 샛길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고 손님 맞기를 사양하다가 오랜 친구인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이 찾아올 때만 이 길을 통해 안으로 들게 했다. 두 사람은 모두 입신양명을 멀리한 고사(高士)였다. 이후로 삼경(三徑, 三逕)은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거한 사람 또는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의 정원을 뜻하게 되었다. <三輔決錄 逃名 : 蔣詡, 字元卿. 舍中三徑, 唯羊仲求仲從之遊, 皆挫廉逃名不出.> 그리고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 또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卷5> 이후로 장사삼경(蔣舍三徑), 도잠삼경(陶潛三徑) 등 수많은 인용의 전고가 되었다.

삼익[三益] 좋은 친구. 세 사람의 유익한 벗이라는 말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유익한 교우도 세 가지 유형이 있고, 해로운 교우도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정직한 사람을 벗하고 신실한 사람을 벗하고 견문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벗하고, 부드러운 척 잘하는 사람을 벗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벗하면 해롭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