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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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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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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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음[湖陰] 조선 시대 문신(文臣)인 정사룡(鄭士龍)의 호이다.

호읍[鄗邑] 지금의 하북성 백향현(栢鄕縣) 북쪽이다.

호의[狐疑] 의심(疑心)하여 결정(決定)하지 못함. 또는 그 사람을 이른다.

호의[縞衣] 자신의 아내를 겸칭(謙稱)한 말이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출기동문(出其東門)에 “흰 저고리 초록 치마가 그래도 나의 사랑이로다.[縞衣綦巾 聊樂我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호의호식[好衣好食]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이란 뜻에서, 잘 입고 잘 먹는 것을 말한다. 금의옥식(錦衣玉食). 반대말은 악의악식(惡衣惡食).

호자[胡仔] 송(宋) 나라 사람으로, 호는 초계어은(苕溪漁隱)이다.

호자[瓠子] 호자는 지금의 하남성 거야현에 있던 대야택(大野澤)에서 황하의 남안 도시인 복양시(濮陽市)를 거쳐 황화로 흘렀던 하천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 이곳에서 황하수가 터졌다고 한다.

호자가[瓠子歌]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지은 노래 이름이다. 무제 때 황하수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복양현(濮陽縣)에 있는 호자(瓠子)의 둑을 터뜨리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를 시켜서 터진 곳을 메우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에 무제가 사방에 가 봉선(封禪)한 뒤에 친히 이곳으로 와 급인(汲仁)과 곽창(郭昌)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징발하여 메우게 하였는데, 장군(將軍) 이하가 모두 등에 짐을 지고 가 메우면서 기원(淇園)의 대나무를 모두 잘라다가 채워넣어 마침내 공사를 완공하였다. 그러자 무제가 호자가를 짓고는 이곳에다가 선방궁(宣房宮)을 세웠다. <漢書 卷6 武帝紀>

호장[壺漿] 어진 관원이 지나가면 백성들이 항아리에 미음을 담아 가지고 바치면서 환영한다는 뜻이다.

호장백일선[壺藏白日仙] 한(漢)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여남시(汝南市)의 연리(椽吏)로 있었는데, 시(市)에 한 노인이 병[壺] 하나를 매달아 놓고 약(藥)을 팔다가, 일을 마치고 나면 매양 병 속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데, 비장방이 누상(樓上)에서 그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찾아가 절하고 술과 안주를 대접하며, 같이 병 속에 들어가기를 간청하였다. 병 속에 들어가 본즉, 화려한 집과 좋은 음식들이 가득 찼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신선(神仙)인데 허물을 짓고 귀양왔다.”라고 하였다.

호저[縞紵] 흰 명주띠와 모시옷. 춘추 시대 오(吳) 나라의 계찰(季札)이 정(鄭) 나라의 자산(子産)에게 흰 명주띠를 선사한 데 대하여 그 답례로 자산이 계찰에게 모시옷을 선사한 고사에서 온 말로, 벗 사이의 선물 또는 교의(交誼)의 뜻으로 쓰인다. <左傳 襄公二十九年>

호저회[縞紵懷] 춘추 시대에 오(吳) 나라 계찰(季札)이 정(鄭) 나라 자산(子産)에게 흰 명주 띠를 선사하고, 자산은 그 답례로 계찰에게 모시옷을 보낸 고사에서 온 말이다.

호전[胡銓] 송(宋)의 여릉(廬陵)사람으로 호가 담암(澹菴)이다. 고종(高宗)때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서 당시 진회(秦檜)가 금(金)과의 화의를 주장하여 금나라 사신이 강남 지방을 조유(詔諭)한다는 명분으로 임안(臨安)에 이르자, 호전이 글을 올려 진회와 손근(孫近) 및 금나라 사신 왕륜(王倫) 세 사람의 목을 베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진회의 노여움을 사, 후에는 길양군(吉陽軍)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후 진회가 죽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그를 다시 봉의랑(奉議郞)에 복위시키고 이어 소대(召對)하였다.<宋史 卷三百七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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