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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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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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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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興八首[其三]추흥8수3 / 가을날의 흥취

 

- 杜甫[두보] -

 

千家山郭靜朝暉[천가산곽정조휘] 천여 호 산성 마을 아침 햇살 고요한데

日日江樓坐翠微[일일강루좌취미] 날마다 강루에서 푸른 산 빛에 앉아있네

信宿漁人還泛泛[신숙어인환범범] 이틀 밤 새운 어부들은 배 띄워 돌아오고

淸秋燕子故飛飛[청추연자고비비] 가을도 깊었는데 제비는 여전히 나네

匡衡抗疏功名薄[광형항소공명박] 광형처럼 상소를 올렸으나 공명은 하찮고

劉向傳經心事違[유향전경심사위] 유향처럼 경전 전하려 했으나 어그러졌네

同學少年多不賤[동학소년다불천] 함께 공부한 소년들은 대개 귀한 신분 되어

五陵衣馬自輕肥[오릉의마자경비] 장안에서 좋은 옷에 살찐 말 타고 다니는데

 


  • 두보[杜甫]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두릉야로(杜陵野老), 두릉포의(杜陵布衣) 등이 있다. 양양(襄陽) 지방 출신으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40대인 천보(天寶) 14년(755년)에야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당시 장안에서 반군에게 잡혔다가 탈출, 숙종(肅宗)의 진영에 합류하여 좌습유(左拾遺)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낸 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두습유(杜拾遺), 두공부(杜工部) 등으로 불렀고, 또 장안성 밖 소릉(少陵)의 초당(草堂)에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두소릉(杜少陵), 두초당(杜草堂)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는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함께 이두(李杜)로 불렸는데,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隱)의 합칭인 소이두(小李杜)와 구별하기 위해 대이두(大李杜)라고도 부른다. 문학을 발판 삼아 벼슬로 나아가려던 그의 꿈이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짧은 한때를 빼고는 평생을 가난과 병으로 고생을 겪어야 했다. 중국의 서북 지역을 유랑하다가 결국 병사했다. 벼슬살이와 달리 문학, 특히 시에서 이룬 성취가 대단하였다. 남긴 시가 1500여 수에 달하며 작품집으로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 그 자신은 시성(詩聖)으로, 또 그의 시는 시사(詩史)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 정회[情懷] 가슴에 사무쳐 오는 정과 회포. 생각하는 정과 회포(懷抱).
  • 산곽[山郭] 산 밑의 성(城)에 둘러싸인 마을. 우뚝하게 높이 솟아 성같이 된 산. 산촌(山村). 산간 마을.
  • 조휘[朝暉] 아침에 비치는 햇빛. 아침햇빛.
  • 취미[翠微] 산기슭. 산의 중턱. 산의 중허리. 먼 산에 엷게 낀 푸른 빛깔의 기운. 산기운이 푸르러서 아롱아롱하게 보이는 빛. 청록(靑綠)빛의 산색(山色). 청산(靑山). 먼 산에 아른아른 보이는 엷은 푸른 빚. 산 중턱의 옥빛처럼 푸른 산기(山氣). 이백(李白)의 시 증추포유소부(贈秋浦柳少府)에 “흰구름 바라보며 붓 휘두르고, 발 걷어 푸른 산 빛 마주 대하네.[搖筆望白雲 開簾當翠微]”라고 하였다.
  • 신숙[信宿] 재숙(再宿). 이틀 밤을 유숙하는 것. 또는 놀이에 빠져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구역(九罭)에 “기러기 높이 날다 물가 땅으로 내려왔네, 어르신 떠나시면 돌아오지 않을 거라, 그대 있는 이곳에서 이틀 밤을 묵으셨네.[鴻飛遵陸 公歸不復 於女信宿]”라고 하였다. 또, 시경(詩經) 주송(周頌) 유객(有客)에 “손님이 하룻밤을 유숙하며 손님이 이틀 밤을 유숙하니 끈을 주어 그 말을 동여매리라.[有客宿宿, 有客信信, 言授之縶, 以縶其馬.]”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시경집전(詩經集傳)에 “하룻밤을 유숙함을 숙이라 하고, 이틀 밤을 유숙함을 신이라 한다.[一宿曰宿, 再宿曰信.]”라고 하였다. 또, 좌전(左傳) 장공삼년(莊公三年)에 “하룻밤은 사(舍)라 하고, 이틀 밤은 신(信)이라 하고, 이틀 밤을 넘는 것은 차(次)라고 한다.[一宿爲舍, 再宿爲信, 過信爲次.]”라고 하였다.
  • 범범[泛泛] 표류하는 모양. 가득 차는 모양. 들떠서 침착하지 못한 모양. 깊지 않다. 이리저리 떠다니다. 휩쓸리다.
  • 청추[淸秋] 맑게 갠 가을. 맑고 상쾌한 가을날. 음력(陰曆) 8월의 별칭(別稱). 음력 9월. 보통 만추(晩秋)를 가리킨다.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청추절(淸秋節)이라고도 한다.
  • 광형[匡衡] 한(漢)나라 선제(宣帝)·원제(元帝)·성제(成帝) 때 사람으로 자(字)는 치규(稚圭)이다. 후창(后蒼)에게 제시(齊詩)를 배웠다. 경학자(經學者)로서 시경(詩經)을 잘 해설하였으며,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숭상하였다. 선제(宣帝) 때 태상장고(太常掌故), 평원문학(平原文學)을 역임하고, 원제(元帝) 때에는 낭중(郎中), 박사(博士), 급사중(給事中), 어사대부(御史大夫), 태자소부(太子少傅) 등을 거쳐 기원전 36년(建昭3)에는 승상(丞相)이 되고 낙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사단(師丹)·복리(伏理)·만창(滿昌) 등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몽구(蒙求)에 광형이 집이 가난해서 등불을 켤 수 없자 이웃집의 벽에 구멍을 뚫어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는 광형착벽(匡衡鑿壁)의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 권81 광형전(匡衡傳)에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집안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해서 살았다.”라고 하였다. 또, 시(詩)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제유(諸儒)들이 서로 말하기를 “시 해설을 하지 마라. 광형이 오고 있다. 광형이 시를 해설하면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듣는다.[無說詩, 匡鼎來. 匡說詩, 解人頤.]”라고 하였다. 광형은 일찍이 성제(成帝)에게 상소(上疏)하여 배필(配匹)을 신중히 세워야 한다는 것을 진술한 적이 있다.
  • 광형[匡衡] 광형은 서한(西漢)의 경학가(經學家)로 자(字)는 치규(稚圭)이고 동해승(東海承: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창산현蒼山縣) 사람이다. 경의(經義)에 두루 통하였으며 특히 시(詩)의 강설에 뛰어났다. 선제(宣帝) 때 평원문학(平原文學)이 되고, 원제(元帝) 때 태자소부(太子少傅)·승상(丞相)이 되어 낙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직언을 잘하여 면직되기도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면서 공부하였다. 착벽투광(鑿壁偸光)이라는 성어의 주인공으로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촛불이 없어 글을 읽을 수 없자 몰래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 이웃집의 불빛이 자기 집으로 비추도록 하여 그 빛으로 글을 읽었다.[衡乃穿壁引其光, 以書映光而讀之.]”고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서한의 모든 유학자 가운데 동중서 이후로 오직 광형의 언어가 바르고 기품 있었다.[西漢諸儒, 自董仲舒之後, 唯匡衡之言純正溫雅.]”라고 하였다. 시경(詩經)에 대한 풀이를 잘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시경에 대해 풀이할 사람이 없다 싶으면 광형이 바로 오고, 광형이 시경을 풀이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웃음을 터뜨린다.[無說詩, 匡鼎來, 匡說詩, 解人頤.]”라고 하였다. <漢書 卷81 匡張孔馬傳>
  • 항소[抗疏] 임금에게 상소문(上疏文)을 올림.
  • 상소극간[上疏極諫] 소(疏)를 올려서 극도로 간쟁(諫諍)하다.
  • 유향[劉向] 전한(前漢) 때의 경학가(經學家)이자 정치가로 자는 자정(子政), 본명은 갱생(更生)이다.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의 현손(玄孫)이다. 문장에 능통하고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다. 아들 유흠(劉歆)과 함께 칠략(七略)을 저술하여 목록학의 대가로 꼽힌다. 선제(宣帝) 때 여러 차례 봉사(奉事)를 올려 음양(陰陽)의 휴구(休咎)로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통절(痛切)하였고, 외척(外戚) 왕씨(王氏)를 신랄하게 공척(攻斥)하였다. 원제(元帝) 때에 산기종정(散騎宗正)이 되어 소망지(蕭望之) 등과 함께 환관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의 전횡을 막으려다가 도리어 참소를 받고 하옥되었다. 성제(成帝) 때에 다시 등용되어 이름을 향(向)으로 고쳤고 벼슬이 중루교위(中壘校尉)에 이르렀는데 왕망(王莽)이 권세를 천단하는 바람에 중용되지 못하였다.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 열녀전(列女傳), 열선전(列仙傳), 신서(新序), 설원(說苑)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漢書 卷36 劉向傳>
  • 유향[劉向] 전한 말기 패현(沛縣) 사람이다. 본명은 갱생(更生)이고, 자는 자정(子政)이다.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의 4세손이고, 유흠(劉歆)의 아버지다. 벼슬은 중루교위(中壘校尉)를 지냈고 경학(經學)에 뛰어났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공부했고, 음양휴구론(陰陽休咎論)으로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면서 여러 차례 외척이 권력을 잡는 일에 대해 경계했다. 궁중의 비서(秘書)를 교열하고, 해제서 별록(別錄)을 저술하여 목록학(目錄學)의 비조가 되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성제(成帝) 때에 서적이 자못 망실(亡失)되어 있자 알자(謁者) 진농(陳農)으로 하여금 천하에 남겨진 책을 구하게 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에게 조칙을 내려 경전(經傳)과 제자(諸子) 및 시부(詩賦)를 교정하게 하니, 한 권이 끝날 때마다 유향(劉向)이 매번 그 편목을 정리하고 그 책의 취지를 요약한 다음 이를 기록하고 아뢰었다.”라고 하였다.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사부(辭賦)와 그의 문인 송옥(宋玉)의 작품을 모아 초사(楚辭)를 편집하였으며 춘추전국 시대로부터 한나라 때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언행을 분류하여 신서(新序)와 설원(說苑)을 편찬했다. 그리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나타난 여인들 중 모범과 경계로 삼을 만한 사례를 모아 열녀전(列女傳)을 저술했다. 그 밖의 저서에 오경통의(五經通義),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 전국책(戰國策) 등이 있다.
  • 유향[劉向] 전한(前漢) 때의 경학자(經學者)로 본명은 갱생(更生), 자는 자정(子政)이며, 강소성(江蘇省) 패현(沛縣) 사람이다. 유흠(劉歆)의 아버지이다. 선제(宣帝) 때 낭중(郎中) 등을 지냈다. 특히 좌씨전(左氏傳)을 매우 숭상하여 강론과 저술을 많이 하였다. 한(漢)나라 국족으로서 경술(經術)연구에 몰두하여 잠을 자지 않고 밤을 꼬박 새우기가 일쑤였다. 아들 유흠(劉歆)이 중국 최초의 서적목록인 칠략(七略)을 정리하는 기초작업을 했다.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신서(新序)・열녀전(列女傳)・설원(說苑)등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이다. 성제(成帝)때 외척 왕씨가 정권을 독단하고 큰 재변이 자주 일어나자, 재변이 일어난 이유가 외척의 세력이 강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홍범오행전론(洪範五行傳論)을 지어 천자에게 올림으로써 왕씨의 권력을 빼앗도록 유도하였는가 하면, 왕릉의 규모를 너무 사치스럽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잘못을 간하는 등 여러 번 충언을 올렸으나 천자가 나약하여 한 번도 그의 말을 시행하지 못했다. <漢書 卷三十六 劉向傳>
  • 유향[劉向] 한 성제(漢成帝) 때 사람으로 자는 자정(子政)이다. 한나라 고조(高祖)의 배다른 동생 유교(劉交)의 4세손이다. 12살에 궁중에서 임금의 연(輦)을 인도하는 연랑(輦郞)이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선제(宣帝)에게 기용되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수십 편의 부송(賦頌)을 지었다. 신선방술(神仙方術)에도 관심이 많았고, 황금 주조를 진언하고 이를 추진하다가 실패하여 투옥되었으나 부모 형제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다시 선제에게 기용되어 석거각(石渠閣)에서 오경을 강의했다. 다음 황제인 원제(元帝), 성제(成帝) 때에는 유(劉) 씨의 족장으로서 외척과 환관의 횡포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원래 이름은 갱생(更生)인데, 성제(成帝) 때에 이름을 향(向)으로 고치고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어 경전(經傳), 제자(諸子), 시부(詩賦) 등의 서적을 교열하여 별록(別錄) 한 책을 만들었는데, 중국 최초의 분류명목이 되었다. 외척의 횡포를 견제하고 천자의 감계(鑑戒)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예로부터 진(秦), 한(漢)에 이르는 부서재이(符瑞災異)의 기록을 집성하여 홍범오행전론(洪範五行傳論)을 저술했다. 그밖에 저서에 설원(說苑), 신서(新序), 열녀전(烈女傳), 전국책(戰國策), 별록(別錄) 등이 있다. 쌍계유고(雙溪類藁) 권70에 “유자정(劉子政)의 경술(經術)은 여러 유학자 중에 으뜸이고 이장길(李長吉)의 문장은 천하에 전해졌다.”라고 하였다.
  • 심사[心事]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 걱정거리. 마음속으로 바라는 일. 시름. 염원.
  • 오릉[五陵] 본래는 장안(長安) 부근에 있던 한조(漢朝)의 다섯 기의 능묘(陵墓)를 일컫는 것으로, 고제(高帝)의 장릉(長陵), 혜제(惠帝)의 안릉(安陵), 경제(景帝)의 양릉(陽陵), 무제(武帝)의 무릉(茂陵), 소제(昭帝)의 평릉(平陵)이다. 현종 이전에 당실(唐室) 역시 다섯 기의 선제(先帝)의 능묘(陵墓)가 있었으니, 고조(高祖)의 헌릉(獻陵), 태종(太宗)의 소릉(昭陵), 고종(高宗)의 건릉(乾陵), 중종(中宗)의 정릉(定陵), 예종(睿宗)의 교릉(橋陵)이 그것이다. 이백(李白)의 시 영왕동순가(永王東巡歌)에 “두 분 황제 순행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오릉의 송백들이 사람들을 울리네.[二帝巡遊俱未回 五陵松柏使人哀]”라고 하였다. 오릉은 한(漢)나라 때 도성 부호(富豪)의 경박하고 호협한 자제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전하여 호협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곳에 능을 세울 때마다 사방의 부호들을 옮겨 와 살도록 했기 때문에 이런 뜻이 생겼다. <漢書 卷92 原涉傳>
  • 오릉[五陵] 오릉은 장안(長安) 서북쪽에 있는 한나라 때 다섯 황제의 능원(陵園)을 합칭한 말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장릉(長陵),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의 안릉(安陵),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啟)의 양릉(陽陵),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의 무릉(武陵), 한소제(漢昭帝) 유불(劉弗)의 평릉(平陵) 등을 말하는데, 전하여 오릉이 있는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장안에는 호유(豪遊)하는 사람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백거이(白居易)의 비파행(琵琶行)에 늙은 기녀(妓女)가 옛일을 회상하며 “오릉(五陵)의 소년들이 다투어 비단 머리싸개를 주었나니, 한 곡조 마치면 붉은 비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쌓였다네.[五陵年少爭纏頭 一曲紅綃不知數]”라고 하여, 장안의 부유한 집 자제들의 사치스런 풍류를 묘사하였다.
  • 경비[輕肥] 가벼운 옷과 살찐 말을 이른 것으로 살림에 여유가 있는 것을 뜻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서적이 제나라로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따뜻하면서도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 내가 들은 바로는 군자는 단지 급히 도와야 할 사람을 도와주지 넉넉한 사람을 돕지 않는다.[赤之造齊也, 乘肥馬, 衣輕裘. 吾聞之也, 君子周急不濟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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