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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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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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다 저 너머에 있고

소중한 것은 다 저 너머로 가네

애써 또 다른 저 너머를 그리다

누구나 가고 마는 저 너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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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中書] 대궐의 문서와 조칙 등을 맡아본 한대(漢代)의 관직 이름으로, 승지(承旨)를 뜻한다.

중서[中書] 붓의 이칭(異稱)이다.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모영이 여러 차례 중서령(中書令)에 제수되어 상()과 더욱 친하게 지내자, 상이 일찍이 중서군(中書君)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중서군[中書君] []의 별칭인데, 특히 토끼털로 만든 붓을 말한다.

중서삼책[仲舒三策] 한 무제(漢武帝) 때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현량으로 올린 대책(對策)을 말한다. 무제 초기에 현량과(賢良科)의 대책(對策)을 왕명에 의해 연거푸 세 번 올리고 바로 강도상(江都相)에 임명되었다. 그 대책이 3조항으로 되었기 때문에 3책이라 한다. <漢書 卷五十六 董仲舒傳>

중서자[中庶子] 주나라 때의 관직명이다. 제후들과 경대부들 소생의 서자(庶子)들만을 맡아 교육시키던 관서의 장이다. 상앙(商鞅)이 진나라로 들어 갈 때 위()나라에는 중서자라는 관직이 있었다. 서한 때는 태자부(太子府)에 속해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라고 칭했다. 그 직책은 시중(侍中)과 같아 태자를 따라 다니며 곁에서 모셨다. 봉록은 일년에 600석이었다.

중서자[中庶子] 주나라가 설치한 관직으로 제후나 경(). 대부(大夫)들의 자식들 중 서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후에 춘추와 전국을 거치면서 제후들도 따라서 설치했다.

중석[重席]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 대빙(戴憑)이 경학(經學)에 아주 밝았었다. 한번은 정조조하(正朝朝賀)차 백관(百官)이 모두 모였을 적에 임금이 군신(群臣)에게 명하여, ()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경의(經義)를 묻게 하되, 만일 뜻이 잘 통하지 못한 곳이 있을 경우에는 문득 그 사람의 자리[]를 빼앗아서 뜻이 잘 통하게 설명한 사람에게 보태어 주도록 하였다. 그러자 대빙이 경의에 제일 능통하여 50여 석()을 거듭 빼앗아 앉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七十九 戴憑傳>

중석몰촉[中石沒鏃]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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